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후의 만찬 (문단 편집)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 [include(틀:이탈리아의 세계유산)]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davincilastsupper.jpg|width=100%]]}}} || ||<-2> {{{+1 '''최후의 만찬'''}}}[br]{{{#!wiki style="font-family: Times, serif" ''' ''Ultima Cena'' '''}}} || ||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 '''국가''' ||[include(틀:국기, 국명=이탈리아)]|| || '''제작''' ||[[1490년]]|| || '''사조''' ||[[르네상스]]|| || '''종류''' ||[[벽화]]|| || '''기법''' ||석고벽 위 제소와 수지(resin)에 템페라|| || '''크기''' ||880cm × 700cm|| || '''소장''' ||[include(틀:국기, 국명=이탈리아)][br]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2>|| 왼쪽부터 [[바르톨로메오]], [[대 야고보]], [[사도 안드레아스|안드레아]], [[베드로]], [[유다 이스카리옷]], [[사도 요한]], [[예수 그리스도]], [[소 야고보]], [[토마스]], [[필립보]], [[마태오]], [[타대오|유다 타대오]], [[사도 시몬|시몬]] 순.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유다 이스카리옷|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000><:>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fff>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3> 이름 || 한국어 || [* [[성모 마리아|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코회|도미니코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 영어 || [* 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with “The Last Supper” by Leonardo da Vinci] || || 프랑스어 || [* L'église et le couvent dominicain de Santa Maria delle Grazie avec « La Cène » de Léonard de Vinci] || |||| 국가·위치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밀라노]] || ||<-3> [include(틀:지도,장소=Chiesa Santa Maria delle Grazie)]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0년]] || |||| 등재기준 || (i)[*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93|93]]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템페라 [[벽화]].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495~1497)>.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잡혀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최후의 만찬은 [[성화]]의 소재로도 자주 쓰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다빈치가 그린 것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벽화는 훼손이 심한 편이다. 다 빈치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벽을 약간 뜯어낸 뒤, 뜯어낸 크기만큼 축축한 회반죽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리는 [[프레스코]]화가 일반적이었다. 이 기법은 그림을 단순히 벽 표면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벽에 [[미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이 물리적으로 벽의 일부가 되며, 내구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그런데 매우 이례적이게도 다빈치는 가능한 한 매끄럽게 만든 벽에 [[달걀]] 노른자 등의 수성 접착제를 입히고 그 위에 유화를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활용했다. 이는 프레스코 기법이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리는 다 빈치에게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벽화는 프레스코화보다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림이 많이 훼손되었다.[* 당장 템페라 기법에 [[달걀|뭐가 들어가는지]] 생각해 보자. 게다가 성당이라는 습기가 차기 쉬운 환경도 그림의 변질을 가속화했다.] 다 빈치는 엄청나게 큰 벽[* 위에 그저 소장이라고 되어있어 착각할 수도 있지만, 이 그림은 성당 식당 '''벽 한면 전체'''를 사용해 그려진 그림이라 크기로 알려진 피카소의 [[게르니카]]보다도 크다. 폭이 10m 조금 못 미치는 정도.]에 벽화를 그리는 동안 비례가 어긋날 것을 고려해 종이에 미리 스케치한 후, 선을 벽에 따서 세심하게 칠했다. 또한 다빈치는 창문 밖과 식당 조명을 고려해 그림자를 매우 능동적으로 이용해서 인물 한 명 한 명을 생동감 있게[* 이 그림 이전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그림은 [[예수]]와 [[12사도]]가 경건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게 보통이었으므로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거기다 [[12사도]]의 상징성을 잘 묘사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표징이 없어도 누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묘사해 원본이 막 완성되었을때 보았다면 거의 실물 묘사에 가까웠을것이라고 하며, 원근법을 잘 살려 그림 상단에 성당 벽 무늬[* 위 그림의 왼쪽을 자세히 보면 벽이 약간 나와있는데, 똑같이 이어 그린것이 보인다.]를 이어 그려서 마치 그림이 그려진 성당 내에서 최후의 만찬이 실제로 진행되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도록 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를 해치지 않았다.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의 모델을 찾다가 한 착한 청년을 만나서 그를 모델로 [[예수]]를 그린 후, 세월이 지나서 다시 범죄자를 찾아서 그를 모델로 [[유다 이스카리옷]]을 그렸는데 둘이 실은 동일인물이었다는 속설도 있다.[* 만화 [[사랑의 학교]]에도 나오는 천사와 악마 버젼의 변형인데, 이건 유명한 일화라는 말만 있을 뿐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그냥 설로 이해하는 것이 속편할 듯.] 다만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닌 듯하다. 또한 다 빈치에게 "그림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냐"며 항상 닦달했던 모 [[수도자]]가 유다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역시 확인되지는 않은 이야기. 다빈치의 라이벌이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경우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최후의 심판]]'을 그리던 도중 체세나 [[추기경]]이 '그림이 너무 불경하다'고 비판하자, 체세나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왕인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버린 것. 일설에는 이 그림을 그리는데 2년 9개월이 걸렸는데 사람들을 그리는 데는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고, 나머지 기간은 다 빈치가 그림에 그릴 메뉴를 고르는데 걸린 시간이었다고 한다.[* 다 빈치는 요리사 활동도 했는데,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했던 그의 다른 활동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성공적이었다. 당시에 다 빈치가 추구하던 요리 활동은 시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 현재 보는 최후의 만찬 그림이 오리지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1977년 복원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최후의 만찬은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고, 이 그림은 22년에 걸쳐서 복원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의 언론이나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원작이 아니라 화가들이 덧칠한 수준이라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논란이 된 부분은 '''[[예수]]의 얼굴'''로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해버린 배경이 되었던 드로잉이 다 빈치의 작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복원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원본과 변경점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 그림은 실제 역사 기준으로 한 묘사와 꽤 다른 부분이 많다. 먼저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의 만찬으로 유월절 식사는 해가 진 다음에 먹는 건데, 그림에선 창 밖 풍경에서 보이듯 대낮이다.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마셨다고 하는데 포도주 병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 위의 빵이 덩어리 모양인데 [[유대인]]들은 유월절에는 네모나게 생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다. 몇몇 사람의 복장이 [[르네상스]]풍이다. 원래 고대 유대인들의 식사에서 사용한 탁자는 매우 낮은데 그림에 묘사된 식탁은 유럽식 테이블이다. [[파일:Triclinium01.jpg]] 전통적인 고대 유대인들의 식탁은 이렇게 생겼다. 유대뿐 아니라 당시 로마 시대는 연회 때 평상에 누워서 먹었다. 고대 근동지역 아시리아 및 이집트 신바빌론 지역에서 왕 같은 최고 권력자들이 누운 자세로 식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 유대 및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까지 이런 식사자세가 자유민 남성에게 보편적인 생활 방식였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ㄷ’자 모양의 ‘트리클린니움’ 식탁에서 먹었고, 방의 출입문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일수록 식탁의 주인이나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로 여겼으며, 높은 자리의 좌석 왼편에는(즉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 입장에서 오른편에는) 가장 높은 자리를 두어 엄밀하게 상하를 구분했다. 연회 인원이 많다면 상석끼리 또 다시 ㄷ자 모양의 상하자리를 배치했다. 오른손으로 먹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주로 왼손을 베개에 기대고 우측을 위로 하여 비스듬히 엎드렸다.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왼편으로 누웠다. 왼팔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받치는 데 쓰였고, 오른팔은 자유롭게 사용했다. 따라서 예수 오른쪽에 있던 제자는 자신의 머리를 예수 바로 앞에 둘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에 맞갖게 그가 예수의 가슴에 기대었다고 말한 것이다. 분명히 그는 예수와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는 아니었다. 가장 높은 자리는 주인의 왼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랑 받는 제자가 차지한 자리는 친밀한 친구의 자리였다. >---- >-Charles K. Barre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Westminster, Philadelphia, 1978 그러나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오늘날에 통용되는 '시대고증'에 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이며, 그 당시는 교회 식당의 벽면을 장식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그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식사모습과 그 시대 음식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묘사된 식사 자리의 배치 모습은 레오나르도 시대 당시의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이다.[* 흥미롭게도 이 그림을 보면, 도자기가 수입되기 전까지 유럽인들이 식사 때 유리잔과 주석 접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https://youtu.be/z-wlWkGQ66Y?t=650|#]]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피사체의 조화 대칭 비율 등에서 완벽한 명화로 평가 받으나 사실상 역사적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실제 유월절 식사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